‘국민배우 최진실’ 드라마보다 비극적인 가족사 .

최진실이 살아온 인생 역경은 각본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는 1968년 12월24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성신병원에서 아버지 최국현씨와 어머니 정옥숙씨 사이에서 1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혈액형은 B형이다. 배우 최재성이 6촌 오빠다. 어릴 적부터 연기하는 것을 즐겼고, 드라마를 보고나면 그걸 따라하는 게 일이었다. 장기자랑을 할 기회가 있으면 노래 대신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학창시절 미술에 재능을 보여 선일여고 때는 미대 진학을 꿈꾸기도 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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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가출하면서 부모는 별거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화장품 외판원,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최진실은 햄버거 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동생 최진영도 아르바이트로 광고 모델을 하며 돈을 벌었다. 최진실의 부모는 별거에 들어간 지 13년 만인 1998년 정식 이혼했다. 이처럼 최진실은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최진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학 진학 대신 연예계 진출을 결심한다. 최진실과 동생 최진영은 서로에게 좋은 연기 파트너였다. 둘은 1986년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했지만 6개월 과정의 연수비 38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좌절을 겪어야 했다. 광고 모델로 연예계 데뷔 최진실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87년, 서울 시내 유명 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배우의 꿈을 접을 수 없어 1년 후 그만둔다. 그러던 1988년 4월, 최진영이 계약을 맺고 있던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처음에는 한 CF에서 유명 여배우 대신 수영장에 뛰어드는 대역 연기를 펼치는 등 단역 모델을 했다. 그러다 CF 감독의 추천으로 삼성전자 전속 모델이 됐다. ​그해 가을 삼성전자 VCR 광고에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카피가 대히트를 쳤다. 이것을 계기로 최진실은 일약 연예계의 신데렐라고 부상했고 ‘최진실 신드롬’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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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전속 모델이 된 후 최진실은 VCR 광고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을 계기로 냉장고, 카메라, 진공청소기, 전자레인지,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 등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모든 가전제품의 CF를 촬영했다. 최진실을 광고 모델로 내세운 삼성전자는 경쟁업체를 제치고 가전제품 판매 1위를 차지한다. 1989년 2월 최진실은 MBC 특채 배우로 발탁된다. 이미 방영 중이던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꿈에 그리던 배우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4월 지역감정을 소재로 한 MBC 베스트셀러극장 <시진읍>에서 벙어리 역에 캐스팅 되며 첫 주연을 맡았다. 1992년 1월 MBC 드라마 <약속>에 출연했고, 6월 <질투>를 통해 청춘스타로 발돋움했다. 최고시청률이 56.1%에 달했다. 이후 누나를 따라 연예계에 진출해 배우와 가수로 활동하던 남동생 최진영과 함께 대한민국 연예계를 대표하는 남매 스타로 사랑받았다. 1993년 MBC 드라마 <폭풍의 계절>에서 배우 김희애와 자매애를 펼치며 성숙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최진실은 출연하는 드라마나 CF마다 성공을 거두면서 국민배우로 성장한다. 그녀는 스타가 된 뒤에도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을 숨기지 않았다. 방송에 나와 “어린 시절에 너무 가난해서 매일 수제비만 먹었다”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끄는 것이 부끄러워 친구들 몰래 숨은 적도 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쥐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라는 말을 해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똑순이 같은 그녀의 모습에 국민은 감동하고 힘찬 응원을 보냈다. 화려한 성공 신화 최진실은 ‘성공 보증수표’로 인정받으면서 광고계에서 방송계, 영화계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녀는 영화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1990년 빨치산을 소재로 한 <남부군>을 시작으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0년 <꼭지딴>, 1991년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2년 <숲속의 방>, 1994년 한국 페미니즘 영화사에 새 장을 연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5년 <마누라 죽이기>, 1997년 <편지> 등에서 활약했다. 수상 실적도 화려하다. 청룡영화상 ‘신인 여우상’(남부군),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대종상 ‘여우주연상’(마누라 죽이기), 청룡영화상 ‘한국영화최다관객상'(편지) 등을 수상했다. 최진실에게 첫 시련이 찾아온 것은 1994년이다. 전 매니저 배병수씨가 로드 매니저 전용철씨에게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스타 최진실’ 주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였다. 그런 만큼 갖가지 루머가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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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이 전씨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극에 달했다. “전씨의 뒤에는 최진실이 있다” “최진실이 전씨를 사주했다”는 등의 루머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최진실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연예 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왔지만 잘 이겨냈다. 최진실은 1997년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에 출연한다. <그대 그리고 나>는 시청률 62.4%를 기록했고, 최진실은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다. 1998년에는 괴한으로부터 납치를 당할 뻔하며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촬영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던 중 30대 중반의 괴한이 칼로 위협하며 납치를 시도했다. 다행히 매니저에게 발견돼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결혼과 이혼 최진실은 결혼과 함께 제2의 인생을 꿈꿨다. 2000년 12월5일에 5살 연하의 야구선수 조성민(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과 전격 결혼했다. 최고의 배우와 최고 야구 스타의 결혼이었기에 ‘세기의 결혼’으로 불리며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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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혼 생활은 신혼의 단꿈이 채 깨기 전에 파경을 맞았다. 결혼생활은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조성민씨의 폭행 사실이 드러나면서 최진실은 치명타를 입었다. 최진실은 법정 공방 끝에 2004년 9월 조성민과 협의 이혼했다. 이혼한 최진실과 조성민 사이에는 당시 여덟 살 난 아들 환희와 여섯 살 난 딸 준희가 있었다. 두 사람이 이혼한 후 아이들의 친권은 최진실이 갖고 키워왔다. 2008년 1월 말에는 법원에 자신의 두 자녀가 최씨의 성과 본을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신청서를 냈고, 5월 두 자녀에 대한 성 변경 허가를 받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지극 정성으로 키웠다. 결혼 실패는 최진실의 삶을 극과 극으로 바꿔 놓았다. 단순히 ‘이혼녀’라는 수식어만 붙은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쌓은 성공도 반쪽으로 갈라놓았다. 대중은 그녀를 외면했고, 연예계 활동도 뚝 끊겼다. 사람들은 ‘스타 최진실’을 더 이상 국민배우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심각한 우울증 증세에 시달렸다. 지인들은 “자녀 양육 걱정과 인기를 유지해야 하는 중압감이 컸다. 불면증이 겹치면서 술과 수면제에 의존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연예인으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많은 고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진실은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2005년 KBS드라마 <장밋빛 인생>으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이혼 후 암에 걸리면서도 악착같이 살아가는 ‘맹순이’ 역에 사람들은 푹 빠져들었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들도 맹순이를 보고 삶에 용기를 가졌을지 모른다. 극중 최진실은 절절한 연기로 안방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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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한국갤럽이 조사한 ‘2005년을 빛낸 탤런트’에서 1위를 하고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는다. 이 드라마를 계기로 언론은 최진실에게 ‘제2의 전성기’라고 평가했다. 그 뒤 지난 아픔과 상처를 보듬으며 옛날의 명성을 되찾았다. 2008년 3월부터 MBC 특별기획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출연해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다. 최진실은 재기에 성공한 듯 했으나 또 한 번 위기를 맞는다. 비극적인 결말 그해 9월8일, 절친한 사이였던 개그우먼 정선희의 남편인 배우 안재환이 자신의 승용차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경찰 조사결과 사망원인은 자살로 밝혀졌다. 최진실은 안재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병원에 달려갔고, 고인의 발인까지 정선희 곁을 지키며 상주 역할을 했다. 안재환의 죽음이후 최진실은 “안재환을 대상으로 사채업을 했다”는 등의 거짓 루머에 시달린다. 최진실은 강경 대응에 나서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 이 사건을 의뢰했다. 경찰 수사에서 증권사 직원 백아무개씨(여‧25)가 최초 유포자로 드러났다. 이번 사건으로 최진실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삶에 대한 비관이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자신과 관련된 악성 댓글을 읽고는 주변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 사채니 뭐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왜 이리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정말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 결국 10월2일 오전 6시15분,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샤워부스 안에서 압박붕대로 목을 맸다. 경찰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녀의 나이 4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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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에서 암에 걸려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최진실의 자살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믿을 수 없다’ ‘정말 충격이다’ ‘최진실이 자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 슬프다’ 같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시공을 넘나들었다. 최진실의 미니홈피에는 접속자가 폭주했다. 방명록에는 수만 명의 팬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남겼다.​최진실은 왜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최진실의 자살 배경에 물음표를 던졌다. 온갖 억측도 난무했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반대하는 유족들을 설득해 부검을 실시했다. 경찰은 유족과 매니저 등 주변 사람들의 진술, 최씨의 메모, 자살 직전의 통화 내용 등을 종합해 ‘충동적인 자살’로 결론 냈다. 경찰에 따르면 “공인으로서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평소에도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시신을 화장해 산에 뿌려달라고 말해왔다”고 한다. 평소에도 생과 사를 넘나들며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성장 과정에서 불우했던 가정환경, 결혼과 이혼, 여기에 각종 루머까지 겹치면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 목숨을 끊기 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고, 숨지기 직전에는 지인에게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미안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이 국민배우 최진실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녀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죽음을 암시하는 메모와 지인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그리고 그동안의 고뇌를 담은 수첩 일기장이 전부다. 경찰이 집에서 발견한 수첩 일기장에는 ‘나는 외톨이, 왕따…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삶을 비관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우로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최진실이지만, 여자로서는 그 누구보다 어두운 생을 보냈던 만인의 연인. 최진실의 성공신화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고인의 시신은 화장해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갑산공원묘지에 안치됐다. 고인의 묘역에는 생전에 활동했던 자료 등도 전시됐다. 누나를 먼저 보낸 최진영은 10월14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억울한 우리 누나’라는 제목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유골 도난사건 최진실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사망 1년 후 갑작스레 최진실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9년 8월15일 오전 7시50쯤, 갑산공원 묘역을 순찰하던 공원 관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최진실 분묘의 대리석 중 남쪽 벽면이 깨진 상태였고, 누군가 쇠망치 같은 도구로 10여 차례 내리친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관리인은 8시10분쯤 경찰에 “최진실씨의 유골함이 도난당했다”고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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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유골함’ 도난도 전례 없는 일이지만 유골함 주인이 다름 아닌 ‘최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금세 전국 이슈로 떠올랐고 또 한 번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경찰 수사결과 범행 22일 만에 범인이 검거됐다. 대구에 사는 박아무개씨(40)는 범행동기에 대해 “작년에 신내림을 받았다. 최진실의 영혼이 내 몸에 있다”면서 “꿈에 찾아와 대리석으로 된 납골묘가 답답해 못 있겠으니 흙으로 된 묘로 해달라고 했다. 나는 최진실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진술했다. 동생 최진영의 자살 비극은 최진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자살한 지 불과 1년5개월만인 2010년 3월29일, 동생 최진영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 논현동 2층 다락방에서 목에 전깃줄이 감긴 채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끝내 소생되지 못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배우 겸 가수로 활동했던 최진영은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큰 충격에 빠져 1년 넘게 활동을 전면 중단하기도 했다. ​당시 최진영은 생전 누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기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을 하는 등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누나를 향한 그리움과 복귀를 앞둔 부담감, 외로움에 짓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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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은 자택에서 목 맨 채 숨진 누나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누나의 목에 감긴 줄을 풀어줬다. 이후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많이 했고, “밤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밤을 꼬박 새운 뒤 아침에야 잠을 잔다”고 밝혔다. 그러다 끝내 누나의 뒤를 따랐다. 누나에 이어 동생까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대중들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며 비통에 잠겼다. 최진영의 유해는 화장돼 최진실 옆에 안치됐다. 전 남편 조성민의 죽음 조성민은 최진실과 이혼 후 2005년 심아무개씨와 재혼한다. 따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혼인신고를 통해 법적 부부가 됐다. 하지만 2010년부터 별거에 들어가면서 평탄치 않았다. 결국 2013년 1월6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여자친구 P씨의 오피스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샤워 꼭지에 허리 벨트로 목을 맨 채 숨진 것을 P씨가 발견해 신고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성민은 죽기 전날 밤 P씨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녀가 외출한 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숨지기 전 P씨에게 “그동안 고마웠다. 내가 없어도 꿋꿋하게 잘 살아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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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최진실, 동생 최진영, 전 남편 조성민까지 똑같은 방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스스로 마무리했다. 나이도 최진실과 조성민이 40세 때, 최진영은 39세 때 생을 마감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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